말씀 사역자와 성도와의 관계(1) (고전9:1-11)
포도송이
2022-11-12
조회수 328
7
나의양식2022-11-12 19:48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을 통해 다른성도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것이 교회를 세우는데 얼마나 큰 유익이 있는지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사역자인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교회와 성도를 위해 내려놓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에 의해 바른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바울의 가르침과 사도로서의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합니다 세상적으로 억울해서, 그동안 고린도교회에서 수고한것에 대한 낙망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기 때문에 변호하였을까요? 아니요!! 사도바울은 오직 고린도 성도들이 거짓선지자들에 의해 미혹되어 진리를 떠나게 되지 않게 하기위해 적극적으로 변호하였습니다 오직 그들이 바른복음을 듣고 진리위에 서는 것 외에 간절히 바라는것이 없었습니다 거짓선지자가 아닌 오직 사도바울의 가르침안에서 살아가야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때문입니다 오로지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이 고린도교회를 살리고 우상과 음란이 가득한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사역자와 성도들의 바른 관계는 진리를 전하는 목사를 인정하고 사역자는 오로지 성도의 유익을 위해 진리의 말씀 선포를 힘있게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것입니다 우리가 진리가운데 지금 살아갈 수 있게됨을 감사합니다 말씀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이지만 우리가 먹고 마실 수 있는 말씀인지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분별하며 바른 복음을 들어야 할것 입니다 온 교회가 사역자와 함께 진리로 바른 신앙 가운데 든든히 세워져 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카이로스2022-11-12 22:05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거짓선지자들에 의해 미혹당하자 바울의 사도됨이 흔들리게되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바른 진리를 전하는 사역자임을 성도들에게 적극적으로 변호하게 됩니다
한 교회의 사역자라도 먹고 마시며 결혼하고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어야 되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정당한 물질적인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고 교회가 그것을 충족해줄때에 말씀사역에 더욱 집중할수가 있습니다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소를 위함이 아니라 농부가 결실을 맺기위해 소는 더욱 잘 먹고 힘을 내어 일을 해주어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 성도들에게 유익이 돌아갑니다 군인에게 모든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고 포도원 농부는 포도열매를 얻고 양을 치는자는 젖을 얻듯이 사역자들의 수고에 대한 후원을 교회가 책임져줄때 오직 성도들을 위해 교회사역을 더 잘 감당할수 있게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성장될것입니다
한 교회의 사역자라도 먹고 마시며 결혼하고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어야 되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정당한 물질적인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고 교회가 그것을 충족해줄때에 말씀사역에 더욱 집중할수가 있습니다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소를 위함이 아니라 농부가 결실을 맺기위해 소는 더욱 잘 먹고 힘을 내어 일을 해주어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 성도들에게 유익이 돌아갑니다 군인에게 모든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고 포도원 농부는 포도열매를 얻고 양을 치는자는 젖을 얻듯이 사역자들의 수고에 대한 후원을 교회가 책임져줄때 오직 성도들을 위해 교회사역을 더 잘 감당할수 있게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성장될것입니다
밀알2022-11-12 22:45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을때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 수 있어도 너희에게는 사도라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적극적으로 변호한것은 오로지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이 바른 복음을 계속해서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의 자격과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사용하지 않은 것은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것처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기위해 약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에게도 그러한 삶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성도는 계명 즉 말씀을 지키는 성도가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말씀사역자와 진정한 성도들이 바른 관계를 유지할때 말씀 사역자는 힘을 다해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칠 수 있고 성도들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나다.
말씀사역자와 진정한 성도들이 바른 관계를 유지할때 말씀 사역자는 힘을 다해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칠 수 있고 성도들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나다.
하늘소망2022-11-12 22:58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그 가운데 변화된 성도들의 모습은 그의 사도직분이 참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2절 주 안에서 인 친것)
7절 군복무,포도 농사,목동의 일상에서의 세가지 모습의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력에 당연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원리를 말합니다.바울은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들을 세우는 일을 일차적인 사명으로 하는 사도로서 그런 교회들로 부터 후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이 그렇듯 교회의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목회자들이 말씀분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기도하고 후원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이 성도들의 영혼에 유익이 되는 일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2절 주 안에서 인 친것)
7절 군복무,포도 농사,목동의 일상에서의 세가지 모습의 예를 들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력에 당연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원리를 말합니다.바울은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들을 세우는 일을 일차적인 사명으로 하는 사도로서 그런 교회들로 부터 후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이 그렇듯 교회의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목회자들이 말씀분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기도하고 후원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이 성도들의 영혼에 유익이 되는 일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화과2022-11-12 23:44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거짓 사도들의 말에 현혹되어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바울은 이런 성도들에게 자신을 변호하며 사도직을 주장 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것이였습니다. 이것을 볼때 말씀사역자와 성도들의 관계에 있어서 믿음의 신뢰는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주변의 신앙인 친구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역자의 말씀보다 인터넷에 들었던 말씀의 사역자를 신뢰하며,그동안의 말씀의 정체성이 있었던 친구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말하는 것을 볼때 바울의 변호가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바울은 계속해서 말씀 사역자들의 권리를 성경적인 말씀을 인용해 근거로 제시하며 계속 설득해 나가며 일반 성도들도 일을 통해 생계의 유지하기 위함이 있듯이 복음의 사역자의 생계의 유지의 타당함의 권리를 말합니다.우리는 건강하고 바른 교회의 영적인 성장과 유익을 위해서 말씀 사역자를 믿고 신뢰하며 교회가 최선을 다해 넉넉함으로 공급할수 있어야 합니다.
마라나타2022-11-13 00:18
바울은 사도로서 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었지만 누리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자유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열심히 했지만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성도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과 아볼로가 전해준 참 복음의 말씀을 준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거짓된 사도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유혹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거짓된 말씀에 고린도 성도들 처럼 언제든지 현혹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혁주의 관점을 가진 목사들이나 교수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감사하게도 우리교회 목사님은 개혁주의 청교도들의 정신을 가지고 바른진리 안에 깨어 있어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가르치기 위해 수고하십니다.우리또한 목사님이 목회 하시는데 물질적으로 힘들지 않게 성도로서 해야할 사명을 잘 감당 할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레이즈업2022-11-22 14:07
교리가 중요한가? 삶이 중요한가?
성경을 읽다보면 화자 또는 저자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감정으로 말하거나 글을 쓰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일때가 많습니다. 9장은 사도바울이 덤덤한 표정과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몹시 흥분된 표정을 하고 격분된 감정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9장 1~11절에서 바울이 마치 속사포처럼 마구 쏟아내는 물음을 통해 그의 표정이 매우 흥분되어 있고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격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처럼 흥분하고 격양되어 있었을까요?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격분한 나머지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바울이 당연히 누려야 할 사도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삶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포기, 자기 비움, 낮아짐, 절제, 자기 부인 등 십자가의 삶이자 기독교적인 삶이었습니다. 바울이 그처럼 흥분하고 격분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고린도성도들의 위태로운 신앙때문이었습니다. 교리(지식)와 삶이 일치되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이자 거룩함과 사랑의 영이 숨 쉬지 않는 신학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리와 삶은 구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땔래야 땔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입니다. 교리는 삶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삶은 교리를 바탕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기독교적인 삶과 실천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여호와는 요시아 왕에 대해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렘22: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뮤얼 밀러(1769~1850) 신학 교수는 “사람들은 지적으로 정확하게 진리를 이해하며 열심을 다해 그 진리를 옹호하면서도 그 진리의 능력에는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바울의 격양된 목소리를 통해 그 옛날 광야에서 울려 퍼졌던 세례 요한의 선지자적 외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이며, 교리와 삶이 일치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고 외쳤던 세례 요한의 거친 목소리가 바울의 흥분된 표정과 격양된 목소리가 되어 여전히 살아있는 울림이 되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허울뿐인 신앙인들을 꾸짖고 있으며, 거창하게 하나님에 대해 읊조리지만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어쩌면 나와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는 거짓된 신앙의 자태를 폭로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화자 또는 저자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감정으로 말하거나 글을 쓰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일때가 많습니다. 9장은 사도바울이 덤덤한 표정과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몹시 흥분된 표정을 하고 격분된 감정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9장 1~11절에서 바울이 마치 속사포처럼 마구 쏟아내는 물음을 통해 그의 표정이 매우 흥분되어 있고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격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처럼 흥분하고 격양되어 있었을까요?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격분한 나머지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바울이 당연히 누려야 할 사도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삶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포기, 자기 비움, 낮아짐, 절제, 자기 부인 등 십자가의 삶이자 기독교적인 삶이었습니다. 바울이 그처럼 흥분하고 격분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고린도성도들의 위태로운 신앙때문이었습니다. 교리(지식)와 삶이 일치되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이자 거룩함과 사랑의 영이 숨 쉬지 않는 신학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리와 삶은 구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땔래야 땔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입니다. 교리는 삶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삶은 교리를 바탕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기독교적인 삶과 실천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여호와는 요시아 왕에 대해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렘22: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뮤얼 밀러(1769~1850) 신학 교수는 “사람들은 지적으로 정확하게 진리를 이해하며 열심을 다해 그 진리를 옹호하면서도 그 진리의 능력에는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바울의 격양된 목소리를 통해 그 옛날 광야에서 울려 퍼졌던 세례 요한의 선지자적 외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이며, 교리와 삶이 일치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고 외쳤던 세례 요한의 거친 목소리가 바울의 흥분된 표정과 격양된 목소리가 되어 여전히 살아있는 울림이 되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허울뿐인 신앙인들을 꾸짖고 있으며, 거창하게 하나님에 대해 읊조리지만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어쩌면 나와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는 거짓된 신앙의 자태를 폭로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고린도성도들이 영적유익을 얻고 하나님안에 거할수 있게 된것은 바울을 포함한 여러 말씀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모든 성도들이 같은생각, 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나아가야할 중요한 이유중 하나입니다. 예기치 않는 거짓사도들로 인하여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게 되고 이로인해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게 됨을 볼수있습니다.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이 그러하듯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목회자를 통하여 바른 말씀의 양육을 받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질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앞에 진리가 세워짐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말씀사역자가 말씀의 꼴을 먹이기에 부족하지 않도록 아낌없는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를 사도바울은 오해했던 고린도성도들에게 사도직으로써 변호했음을 알수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