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1-10)

Coram Deo
2023-09-16
조회수 116
12

나의양식2023-09-16 11:30
새언약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삶속에서 신실한 신자로 살아가기 위해 신실한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해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땅에서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은 고단한 삶이기에 현재의 몸, 보이는 집은 나날이 무너져가고 있어 탄식의 소리가 날 수 밖에 없을때, 세상사람들과 같이 노후된 장막집을 보며 소망없이 살거나 세상의 방법만으로 위로를 삼으려는 유혹이 너무도 가까이 있기때문입니다 지금의 장막집은 나날이 노쇠하다가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그 무너짐 후 새언약의 일꾼들에게 그날은 탄식이 없는 영원한 집을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런 날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난과 환란으로 비가 새고 바람이 스며드는 장막집을 무너뜨리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하늘의 영원한 집 부활의 몸을 덧입게될 그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갈 수록 우리가 덧입게 될 하늘의 장막에 대한 소망이 더욱 간절해질것 입니다 이 소망은 성령께서 인치심으로 확증하여 주셨기에 확실합니다 이땅에서 겪는 많은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이겨내고 해결되는 응답을 받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하여 우리의 탄식을 통해 덧입혀질 영원한 집에서 주님과 함께 할 참 쉼과 영광이 있을 그날을 더 사모하는 신앙으로 발돋음 하길 소망합니다 무너져가는 장막의 삶속에서 장막을 위해 어떻게든 내 방식으로 붙들려 했던 것들을 내려 놓고,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주를 위한 삶을 살아가므로 새언약의 일꾼다운 소망을 더 붙들길 원합니다

포도송이2023-09-16 17:22
사도바울의 소망은 단 한가지 어떻게하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은 나날이 힘들고 지쳐 고난이 힘겹게 다가오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영원히 있을 부활의 몸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삶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으며 삶의 목표와 기쁨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을 드러내는 삶으로 살아가는 새언약의 일꾼답게 주신 사명 감당하길 원하지만 뜻대로는 잘 되지 않는것 같습니다. 때때로 원치 않는 짊어질 장막집이 우리앞에 놓인다해도 사도바울이 바라보았던 영원한 집을 바라보며 부활의 소망이 삶 가운데 덧 입혀지길 소망하며 힘을 내어 봅니다.
삶의 탄식과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채울수 없습니다. 내 안의 기쁨은 사도바울처럼 주를 향한 기쁨의 삶으로 채울수 있음을 믿고 주를 위한 기쁨의 삶으로 날마다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삶의 탄식과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채울수 없습니다. 내 안의 기쁨은 사도바울처럼 주를 향한 기쁨의 삶으로 채울수 있음을 믿고 주를 위한 기쁨의 삶으로 날마다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마라나타2023-09-16 21:51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어디에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참된 일꾼은 아닙니다.우리의 행동으로도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 말과 행동을 보고 평가를 합니다.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고 있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었습니다. 그리고 무너지는 집과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집 무너지는 집은 우리의 몸이요 영원한 집은 보이지 않는 부활의 몸을 말합니다.바울은 현재 몸에 고난이 올수록 시선은 하늘로 향했습니다. 우리도 이땅에 살면서 어떠한 문제나 고난이 와도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영원한 집에 살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밀알2023-09-16 21:55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현재 겪는 고통이나 고단한 삶이 잠시 뿐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삶을 소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을 장막의 집으로 비유합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장막의 집에서 영원한 집으로 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나라에 입성하기 위해 부활의 새 옷을 입는 과정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인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내게 해야 합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현재 땅에 있는 나의 장막집에 무엇을 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을 장막의 집으로 비유합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장막의 집에서 영원한 집으로 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나라에 입성하기 위해 부활의 새 옷을 입는 과정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인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내게 해야 합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현재 땅에 있는 나의 장막집에 무엇을 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늘소망2023-09-16 23:24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자신이 당한 고통과 시련에 맞서서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이 세상에 있는 동안 육안으로 주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과 그 분의 구원 계획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죽음 이후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이 땅에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 할것입니다.우리의 몸으로 행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이 땅에서 제가 행했던 모든 삶은 그 곳에서 평가 받게 될것 입니다.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주님을 만난다는 기쁨인 동시에 거룩한 두려움이기도 합니다.설교 말씀 처럼 우리의 장막집이(유한한 육체)어떤 거처가 되기를 원하고 바라는지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야 겠습니다.

엘사2023-09-16 23:40
새언약의 일꾼에게 주어진 사역,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을 몸을 통해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과 핍박, 결핍속에서도 사역을 감당해나갔습니다. 바울은 이세상의 장막인 현재의 몸은 탄식의 소리와 함께 할 수밖에 없음을 알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집, 부활의 몸을 소망하며 인내했습니다. 부활의 몸이 현재의 몸위에 덧입게 되기를,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주님과 함께 하기 전까지는 어디에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다짐했습니다.
바울이 품었던 소망을 바라봅니다. 이 땅에서 탄식의 시간을 보내겠지만 주와 함께 할 날을 소망하며, 부활의 몸으로 주님앞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날 서게 될 주님의 심판대에 드러날 모든 행위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동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묵상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품었던 소망을 바라봅니다. 이 땅에서 탄식의 시간을 보내겠지만 주와 함께 할 날을 소망하며, 부활의 몸으로 주님앞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날 서게 될 주님의 심판대에 드러날 모든 행위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동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묵상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오직감사2023-09-17 08:32
새언약의 일꾼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질때, 헌신할때, 믿음을 보일때,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때 이 땅에서 그리고 내 작은 삶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세밀하게 볼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그 귀한 축복과 은혜를 이땅의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지혜와 성령충만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여 맡겨주신 짐을 가볍게 기쁘게 감사함으로 짊어지기 원합니다!! 부활소망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Jesus is the Way2023-09-17 12:25
어디에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 제목을 보고 제가 살아오고 있는 인생을 다시 돌이켜 보았습니다. 과연 내가 주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생각했던 날은 나의 삶을 위하여 흘렸는지 생각하게 보았습니다. 또 과연 오랜 시간이 흘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께 떳떳이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다고 주님께 말씀 드릴 수 있을지 고민을 해보는 말씀이었습니다. 매일을 살아가면서 탄식할 수 밖에 없고 주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 삶 속에서 하늘의 있는 영원한 집을 원하고 주님이 있는 곳으로 제 마음을 변화시키길 원합니다.

서희준2023-09-17 12:44
현재의 보이는 무너질 장막집이 아니라 하늘의 있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집을 소망해야 합니다. 세상에선 탄식의 소리가 나지만 탄식 하는 상황에만 집중하지 않아야 합니다. 장막 집일 때나 장막 집이 무너질 때나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S2023-09-17 12:45
장막의 집은 육신인데 우리는 이 집에서 영원한 집으로 갑니다. 하지만 장막의 집은 무너질 집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고난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주님께로 갈 수 없기에 주를 기쁘게 할 수 있는 행동을 생각하며 실행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임마누엘2023-09-17 19:59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장막집을 꾸미고 채우고 넓히는데 끝없이 시간과 정신을 쏟고 그안에서 즐거움을 찾고 만족감도 얻습니다 그러면 주님과는 점점 멀어지고 세상과는 친밀해집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탄식해야 합니다 없어질 육신의 장막에 살지만 주님으로 덧입을때 내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가를 탄식하며 주님을 붙듭니다 이땅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바라볼수 있게 됩니다 장막을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깨닫고오히려 예수로 덧입기를 힘씁니다 주님안에 진정한 자유와 소망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울처럼 고난에 있던지 죽음을 짊어질때에도 새로운 생명을 기대하며 주님과 눈을 맞춥니다 기쁨이 흘러 넘치도록 주님을 사랑할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주의일에 동참할수 있습니다 이모든것이성령께서 우리를 보증하셨기에 가능함을 믿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탄식해야 합니다 없어질 육신의 장막에 살지만 주님으로 덧입을때 내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가를 탄식하며 주님을 붙듭니다 이땅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바라볼수 있게 됩니다 장막을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깨닫고오히려 예수로 덧입기를 힘씁니다 주님안에 진정한 자유와 소망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울처럼 고난에 있던지 죽음을 짊어질때에도 새로운 생명을 기대하며 주님과 눈을 맞춥니다 기쁨이 흘러 넘치도록 주님을 사랑할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주의일에 동참할수 있습니다 이모든것이성령께서 우리를 보증하셨기에 가능함을 믿습니다

레이즈업2023-09-21 13:53
< 그리스도인들의 "하울링" >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이 본능적으로 가끔 늑대처럼 울어대는 "하울링"을 할때가 있는데, 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어떨때는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 때로는 위험한 상황에 대한 경고, 아무의미 없이 내는 경우, 그리고 가장 주된 이유는 주인으로부터 분리되었을때 외로움과 분리불안으로 "하울링"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본능적으로 내는 "하울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아지들이 내는 하울링에도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내는 "하울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4절 말씀 처럼, 그것은 단지 육신을 벗고자 하는 몸부림이나 절규가 아니라 부활생명을 덧입고자 하는 소망의 목소리임을 알게됩니다.
(4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이 내는 "하울링"은,
단지 우리가 겪게 되는 상황속에서 힘듬과 아픔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분리불안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도 아니다.
경제적 결핍으로 쏟아내는 하소연도 아니며 삶이 너무 고단한 나머지 육신을 벗고자하는 울부짖음도 아니다.
습관처럼 내뱉는 무의미한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할 것에 대한 부활의 확신이자 희망의 목소리이며(4~5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의 유일한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이다(9절).
또한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바라보며 싸우는 힘겨운 몸짓이다(10절)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이 본능적으로 가끔 늑대처럼 울어대는 "하울링"을 할때가 있는데, 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어떨때는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 때로는 위험한 상황에 대한 경고, 아무의미 없이 내는 경우, 그리고 가장 주된 이유는 주인으로부터 분리되었을때 외로움과 분리불안으로 "하울링"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본능적으로 내는 "하울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아지들이 내는 하울링에도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내는 "하울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4절 말씀 처럼, 그것은 단지 육신을 벗고자 하는 몸부림이나 절규가 아니라 부활생명을 덧입고자 하는 소망의 목소리임을 알게됩니다.
(4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이 내는 "하울링"은,
단지 우리가 겪게 되는 상황속에서 힘듬과 아픔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분리불안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도 아니다.
경제적 결핍으로 쏟아내는 하소연도 아니며 삶이 너무 고단한 나머지 육신을 벗고자하는 울부짖음도 아니다.
습관처럼 내뱉는 무의미한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할 것에 대한 부활의 확신이자 희망의 목소리이며(4~5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의 유일한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이다(9절).
또한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바라보며 싸우는 힘겨운 몸짓이다(10절)
부엌에서 일을 하며 장시간 서있었더니, 허리가 아파옵니다. 한 걸음 내밀며 발을 디디는데 '으윽...'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조리대 앞에서 밀린 일 좀 한다고 서있다가 허리에 무리가 갔나 봅니다. 잠시 생각이 스쳐 갑니다. 이런 신체적 고통뿐아니라 나는 이제까지 인생 지내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힘듬을 겪어 왔나... 그리고 그 과정을 어떻게 통과 했나.. 물론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말이죠..
학창 시절 시험 공부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성적이 좋으면 그래도 주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현상'이 좋아 보여서 공부를 해야 겠다는 마음을 먹고 억지로 억지로 시험공부에 임했던 생각말이죠. 지금 돌이켜 보면 '칭찬' 받고 싶어서 '내가 하고 싶은것 참아 가며' '높은 점수를 머릿속에 넣고' '놀고 싶은 마음'을 눌렀던것 같습니다. 시험준비하던 상황에서는 알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던 점수를 마치 높은 점수를 받을것으로 상상하니, 놀고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자체(=고통)를 참아 냈던 거죠.. 그래도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 질병, 노화, 죽음은 우리가 인지하던 인지하지 못하던 매일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죠. 또한 경제적 고통, 가족관계, 직장에서의 노동, 세상의 악한 일들을 목도 하는것 이런 것들도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고스러움과 고달픔의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비법을 저는 본문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누구보다도 핍박과 고통의 나날들을 보냈지만요, 그의 글에는 언제나 힘이 넘쳐 납니다. 애정으로 가득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나를 봐,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이 주시는 희망을 보니 지금 이 순간을 견뎌가고 있어,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렇지는 않아.. 힘들고 배고프지.. 하지만 이건 예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천국과 거기에 가면 받을 상장과 부상을 보니 이겨 낼 수 있겠더라고... '
예전에는 고통과 남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 적당히 타협하고 살았죠..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그 기쁨에 어떤 것도 감수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해 봅니다. 제가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요? 아니면, 또 적당히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쉬운 길로 갈까요? 저는 지금 알 수 없어요.. 솔직히 해낼 자신도 없고요.. 그럼에도 이런 고민을 털어 놓을 분이 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지가 됩니다. 우리 목사님, 사모님과 집사님들 성도님들이 있으니 말이죠..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는 언제나 문의하고 의지 할 수 있는 접근 권한도 있고 말이죠.
이렇게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예수님께 투덜대다가요, 어느날 바울 사도처럼' 어떤 고통이 와도 상관 없어. 나는 이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게 더 중요해!!' 라고 외칠 수 있는 순간 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면, 그분이 진짜 나의 신랑이시라면, 그 분이 원하는 것을 위해 뭐라도 하겠죠? 이걸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